장락동 7층 모전석탑
장락동 7층 모전석탑
지정번호: 보물 459호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제작시기: 신라 후기
1967년 6월 23일 지정
장락동 7층 모전석탑
/ 문규열
*위치: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
*명칭: 장락동 7층 모전석탑
*분류: 종교신앙 / 불교 / 탑
*보물: 제459호 (1967년 6월23일 지정)
우리 제천관내에서 보물 6점(장락동 7층모전석탑: 보물 제459호,
청풍여래입상: 보물 제546호, 청풍 한벽루: 보물 제528호,
신륵사3층석탑: 보물 제1296호, 덕주사 마애블: 보물 제406호,
사자빈신사지석탑: 보물 제94호)
가운데 하나인 장락동 7층 모전석탑은 왜? 중요한 문화재인가를 알아보자
모전석탑이란?
- 돌을 벽돌모양으로 깍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 하였다하여 모전탑이라 한다.
불교문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탑 문화인데
탑의 종류는 목탑과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으로 구분된다.
탑은 항상 사시사철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서
자연현상의 변화를 직접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여
백제의 목탑문화(4세기 후반부터 6세기말 까지)가 신라의 전탑의 모방에서
석탑문화(삼국시대 말: 600년경)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게 된다.
현재 대표적으로 남아있는 목탑으로서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이 있을 뿐,
다른 목탑들은 모두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한다.
목탑보다는 더 견고하고 오래갈 수 있는 자원이 널려져 있던
석재들을 이용하기전의 신라 때는 먼저 흙을 구어서 벽돌을 사용한
전탑(송림사 5층석탑, 안동 조탑동 5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형식을
갖게 되다가 현재 대중을 이루는 석탑으로 변화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장락동 장락사지와 7층 모전석탑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자.
1967년 6월23일. 보물 제459호로 지정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신라시대 8~9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6.25전쟁 당시 포탄에 맞아 피해가 심했다.
전체높이 9,06m, 폭은 3,51Cm에 회흑색 점판암을
벽돌형태로 작게 잘라서 쌓은 모전탑이다.
탑신은 부처의 사리나 불경등을 모셔두는 곳으로 1층의 네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基壇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은 채, 지대석으로 탑신부를 직접 바치도록 하는 구조이며,
8매의 석재로 사용한 지대석인데, 남쪽 면에는 큰 판석1매를 놓고,
북쪽과 동, 서단부에 장대석 7매로 결구하였음을 볼 때, 그 이전에도 중건되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사실, 모전탑은 수명이 약 150년 전후라 한다.
풍화작용에 의한 소실이 커서 최소한 7~8번의 중건을 거친 모전탑이라는 진단을 해 볼 수도 있고,
1967년에 해체복원작업 그 이전에 지대석 하부의 중심에 해당하는 부분의 강회다짐층에서 반파된
석재사리장치를 세운 채로 축조되었던 점도 어느 시기에서 도괴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여겨지는 점이다.
초층 탑신부의 네 모퉁이에는 다른 모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방형 돌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고,
옥개석의 추녀도 비교적 짧으며 다른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風鈴孔이 뚫려있다.
또, 이 석탑은 지반이 약해 해 마다 약간씩 기울어졌다고도 한다.
그래서 해체복원당시에 기단부에서는 백자종편 여러점, 금동편 3점, 금동불상 1점,
사리장치, 석재 1개 등이 나왔다. 소문에 의하면 1968년 4월에 기단부를 조사할 때,
바둑판도 나왔다는 설이 있어서 그 당시 시굴했던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에게 질문했던 대답은
한 마디로 없었다고 단호했다.
지금은 장락 뜰에 외롭게 서 있는 장락동 7층 모전석탑이
가람을 위한 탑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 수계지역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비보탑 역할을 했던 것이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태종 때는
거대한 불교7종단(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자은종)의 하나였던
천태종의 명찰로써 장락사가 있었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다시한번 문화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참고문헌 - 충청대학 2004년 장락사지 시굴조사 보고서
탑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