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舟論聖地)와 황사영백서(黃祠永 帛書)
배론성지(舟論聖地)와 황사영백서(黃祠永 帛書)
/ 문 규열
*위치: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종목: 시도 기념물 제 118호(2001년 3월2일)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지 / 천주교성당
*시대: 조선
주론산 기슭 밑 전체가 성지로 되어 있다시피 한 배론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 지형이 배 모양 밑바닥을 닮은 형상이라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주론(舟論)이라고도 하며,
백운산(해발 1,087m), 구학산(해발 985m)의 연봉사이에 있는 계곡이다.
이러한 계곡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은둔하기에 알맞아 옹기를 구으며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고 신앙을 지켜 갈 수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행정지명이 제천현 근우면 팔송리 도점촌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배론에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로 탄압이 심해지자
은신처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전반적으로 유교가 양반들의 품위를 지키는 사상이었다면
중화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웠던 때라,
신분의 평등을 요구하는 제도에 적잖은 타격이었다.
자연적으로 귀족들이나 양반들은 전통을 유지하려는 제도유지에 안간힘을 썼고,
인간의 불평등을 없애고 민중들이 다 함께하는 사상이 들어와
조선의 양반정치를 하던 노론사회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신유박해는 조상을 모시는 제사문제가 빌미기 되어 탄압이 시작되다가
남인파의 영수였던 “채제공”이 별세하고는 정조왕이 비교적 온화한 정책으로
전환되는 듯 싶었으나 그나마 정조가 승하하자 11세 된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된
수렴청령 정치를 맡게 된 정순왕후 대왕대비는 노론파를 등에 업고,
1801년(순조원년)에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공포하고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철저하게 실시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모든 인물들이 참수되거나, 옥사되고, 유배되었으며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준모” 신부마저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때,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를 가게되고, 황사영은 배론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순교하게 된다.
이로부터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55년에 메스트로(Maistre)신부는 사제양성의
긴급성을 절감하여 한국최초로 “성요셉신학당”을 배론에 세우고 회장 장주기(요셉)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게 하며 살림을 맡아보게 하였다.
학생으로는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3명이 있었다가 차츰 학생수가 많아지자
교장에 프르티에(Pourthie)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ncolas)가 임명되어
수사학과 철학과 신학을 라틴어로 교육시켰으며 한국어번역, 중국어번역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장주기는 1843년에 먼저 이주해 와서 정착했던 집과 땅들을 기중하며 헌신하다가
두 분의 선교사 신부 장주기 이들도 모두 병인박해 탄압의 형장의 이슬이 되어
결국은 목자와 양들이 없는 신학당은 폐쇄되고 말았으며, 이때 남상교, 남종삼 부자는
1만 여명의 신자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분위기로 이끌며 평생을
신앙의 자유가 보상되도록 애쓰다 순교하였다.
한국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안드레아),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토마스),
그리고 최방제는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배론의 장주기로부터 받아 마카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 마카오에서 3명의 유학생들은 메스트로(1808!1857)신부를 만나
신학공부를 배우기도 했던 인연이 있었으며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는
서양 각국의 선박들이 많이 내왕하는 국제도시로 성장 해 있었던 때라
동, 서양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었는데 불행하게도 3명의 유학생 중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병사하고, 김대건(안드레아)는 1845년 8월17일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제의 서품을 받아 1846년 9월15일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만다.
또한 최양업(토마)은 1849년 4월15일 두 번째 신부가 된 사제서품을 받아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다가 1861년 6월10일, 문경에서 병사하여
“프르티에” 신부가 배론의 “성요셉 신학당” 뒷산에 안장했다.
황사영(1775년~1801년) 백서
황사영 백서는 비단에다 글을 써서 천주교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을
북경에 있는포르투칼 출신 구베아 주교에게 건의 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문제가 된
청원서다,.
백서는 해서(楷書)의 가는 모필로서 가로 62cm, 세로 38cm의 고운 명주 폭위에
13,384字로 된 장문의 편지를 쓴 내용으로 서론에는 1~6행간에다
1795년 을묘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를 본론에 7~90행으로 나열하여
전체분량의 70% 해당하는 설명을 했다.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앞날이 촉망되는 어린 선비였다. 정조 임금이 그를 불러
“20세가 되거든 꼭 나를 찾아 오너라, 내가 너에게 일을 시키고 싶다”
라고 할 정도였다.
황사영은 임금과의 옥수(玉手)를 나눴던 감격을 잊지 않기위해
손목에다 비단을 감고 다닐 정도로 정조를 신뢰했다.
그후, 황사영은 정약용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중,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마리아)과 결혼하여 서양문화를 알게 되고
천주교회에 입교하여 “알렉산데르”의세레명을 1791년에 받게 되면서
전시(殿試)에 관심을 기울지 않아 매번 백지상태로 냈는데 정조임금이 황사영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 생겼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슬퍼하기도 했다.
황사영은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 처럼 천주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청양에서 신해년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들어와 옹기를 구으며 신앙생활을 하던
김귀동의 집 토굴에 은거하며 지낼 때, 1801년 8월에 주준모 신부의 순교사실을
전해 듣고는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재건하고 썩은 위정자들의 횡포를 공개하여
조국에 인권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방법으로 백서를 작성해서
8월26일 황심(黃心 1756년~ 1801년)을 통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황심이 체포되면서 발각 되었고
황사영도 1801년 9월29일, 백서의 내용 중에서
서양의 군함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로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또한 그 가족들도 모두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유배를 당했으며, 이사건과 관련된 김한빈과 김귀동도 순교하게 되었다.
이 백서의 원본은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고문서 창고에 있던 것을
1894년 이건영이 발견하여 뮈텔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뮈텔주교는 절두산 기념관에
사본을 보관하고, 원본은 1925년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하여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김귀동과 김한빈이 토굴을 파서 황사영을 숨겨 은신하게큼 만든 그 토굴은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서 옹기의 저장고를 가장하였는데
1987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가 여러 가지의 고증을 토대로 하여 복원시킨 것이며
1999년 성지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118호가 되었다.
그리고 최양업(토마스)은 천주교의 103위성인의 한 분인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사이에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던 분이셨다.
최양업, 그는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입국길에 오른지 7년 반 만에
다섯 번의 입국시도를 하다가 성공하였지만 끝내는 기해박해 때,
부모님들과 함께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