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과有來

장락동칠층모전석탑 . 관란정. 단종유배지

푸른 솔 / 문규열 2009. 5. 11. 15:22

 

                                                        

 

지정번호: 보물 459호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제작시기: 신라 후기

1967년 6월 23일 지정

 


장락동 7층 모전석탑



        / 문규열


 

*위치: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

*명칭: 장락동 7층 모전석탑

*분류: 종교신앙 / 불교 / 탑

*보물: 제459호 (1967년 6월23일 지정)


우리 제천관내에서 보물 6점(장락동 7층모전석탑: 보물 제459호,

청풍여래입상: 보물 제546호, 청풍 한벽루: 보물 제528호,

신륵사3층석탑: 보물 제1296호, 덕주사 마애블: 보물 제406호,

사자빈신사지석탑: 보물 제94호)

가운데 하나인 장락동 7층 모전석탑은 왜? 중요한 문화재인가를 알아보자


모전석탑이란?

- 돌을 벽돌모양으로 깍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 하였다하여 모전탑이라 한다.


불교문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탑 문화인데

탑의 종류는 목탑과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으로 구분된다.


탑은 항상 사시사철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서

자연현상의 변화를 직접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여

백제의 목탑문화(4세기 후반부터 6세기말 까지)가 신라의 전탑의 모방에서

석탑문화(삼국시대 말: 600년경)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게 된다.


현재 대표적으로 남아있는 목탑으로서

법주사의 팔상전이나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이 있을 뿐,

다른 목탑들은 모두 소실되어 찾아볼 수 없다 한다. 


목탑보다는 더 견고하고 오래갈 수 있는 자원이 널려져 있던

석재들을 이용하기전의 신라 때는 먼저 흙을 구어서 벽돌을 사용한

전탑(송림사 5층석탑, 안동 조탑동 5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형식을

갖게 되다가 현재 대중을 이루는 석탑으로 변화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장락동 장락사지와 7층 모전석탑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자.


1967년 6월23일. 보물 제459호로 지정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신라시대 8~9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6.25전쟁 당시 포탄에 맞아 피해가 심했다.


전체높이 9,06m, 폭은 3,51Cm에 회흑색 점판암을

벽돌형태로 작게 잘라서 쌓은 모전탑이다.

 

탑신은 부처의 사리나 불경등을 모셔두는 곳으로 1층의 네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基壇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은 채, 지대석으로 탑신부를 직접 바치도록 하는 구조이며,

8매의  석재로 사용한 지대석인데, 남쪽 면에는 큰 판석1매를 놓고,

북쪽과 동, 서단부에 장대석 7매로 결구하였음을 볼 때, 그 이전에도 중건되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사실, 모전탑은 수명이 약 150년 전후라 한다.

풍화작용에 의한 소실이 커서 최소한 7~8번의 중건을 거친 모전탑이라는 진단을 해 볼 수도 있고,

1967년에 해체복원작업 그 이전에 지대석 하부의 중심에 해당하는 부분의 강회다짐층에서 반파된

석재사리장치를 세운 채로 축조되었던 점도 어느 시기에서 도괴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여겨지는 점이다.

 

초층 탑신부의 네 모퉁이에는 다른 모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방형 돌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고,

옥개석의 추녀도 비교적 짧으며 다른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風鈴孔이 뚫려있다.


또, 이 석탑은 지반이 약해 해 마다 약간씩 기울어졌다고도 한다.

그래서 해체복원당시에 기단부에서는 백자종편 여러점, 금동편 3점, 금동불상 1점,

사리장치, 석재 1개 등이 나왔다. 소문에 의하면 1968년 4월에 기단부를 조사할 때,

바둑판도 나왔다는 설이 있어서 그 당시 시굴했던 충청대학 장준식 박물관장에게 질문했던 대답은

한 마디로 없었다고 단호했다.


지금은 장락 뜰에 외롭게 서 있는 장락동 7층 모전석탑이

가람을 위한 탑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 수계지역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비보탑 역할을 했던 것이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태종 때는

거대한 불교7종단(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자은종)의 하나였던

천태종의 명찰로써 장락사가 있었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다시한번 문화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참고문헌 - 충청대학 2004년 장락사지 시굴조사 보고서



           

                         탑의 명칭



                         

 


 

 

관란정(觀瀾亭)


위치: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 56번지


관란원호는 1397년(태조5년) 4월9일 강원도 원주시 개운동에서 태어나셨다. 태종임금의 스승이기도 했던 조부 운곡 원천석, 병조참판에 추증된 아버지 원헌의 둘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도학군자(道學君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15세 때에 4서3경을 통달할 정도였으며, 한시와 산문을 즐기는 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는 충신이 될 자격이 없다며 유학의 근본인 충효사상을 실천하는 효자이기도 했다.


원씨 집안의 올곧은 정신이 이어져가는 그에게는 세종 5년(14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인물로서 일을 하다가 문종 임금이 병약하여 어린 단종에게 왕위를 위양했을 때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하자 그는 더 이상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송림으로 낙향했다.


치악산 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낮에는 망왕봉에 올라 단종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며, 밤에는 단종을 사모하는 자세를 취하며 지낼 즈음, 뒷켠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임금을 위해 복위운동을 하려던 금성대군은 경북 영주 순흥에서 사사되고, 그를 도왔던 도호부민들과 함께, 숱한 사람들이 소수서원내의 "敬"字밑에서 수창된 비극은 자그만치 4km까지 피가 흘러"피끝마을"이라는 동네의 유래가 만들어 졌으며, 집현전 출신들의 유학자가 참여한 복위계획에는 소위 사육신이라 불려지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중심이 되어 세조 2년(1456년)에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할 것을 모의 하였으나, 세조임금의 공신이 된 한명회가 낌새를 눈치 채고서, 연회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처음 모의를 함께했던 김질이 불안을 느껴,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면서 계획은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물론 문종 임금이 김종서, 황보인에게 단종을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내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반죄를 씌워 참살했으며, 단종은 그때 노산군으로 신분이 추락하는 왕자로 있다가 결국은 그를 지키려던 충신들의 복위가 실패하자, 서인의 신분으로 강봉 되어 유배까지 가는 망향 길에 들어선 단종임금을, 치악산에서 전해 듣게 되는 관란원호는, 단종이 청룡포에 도착하자 청령포 윗 이치에 있는 서강 절벽 위 사내평(思乃坪)에다 초막(草幕)을 짓고, 부인과 함께 채소를 길러 산나물과 함께 표주박에 띄워 단종께 보내면 단종은 그것을 받곤 했다한다.


단종이 원주 부론을 거처 제천서울고개를 지나 영월서면에서 방절리를 경유하는 청룡포에 도착하여, 유배 4개월 만에 1457년 10월24일에 사약을 받자, 묘소 앞에 가서 여막(廬幕)을 짓고 3년 상을 치루었으며, 그 다음 다시 서강 관란정으로 돌아가서 아침저녁으로 단종을 향한 예를 올렸다 한다.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단종을 향한 충절을 기리고자 현종 11년(1845년)에 초막을 짓고 단을 쌓아 정성을 드렸던 그 자리에 유학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비석과 정자를 세워서 원호의 호를 따 관란정이라 했으며 그의 유허비도 옆에 세웠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


이렇게 단종을 향한 충절이 사무쳤으며 또한 그의 탄세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저 멀리 동쪽 언덕을 바라보니

솔잎 파랗게 우거졌네

그 솔잎 따다 찧어서

주린 이내 창자 요기나 하여볼까


눈은 가물가물 저 하늘 멀리 달리는데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여

구름은 하늘을 덮었구나

백이숙제 높은 절개  뉘 있어 짝이 되리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던 일

세상사람 모두 의(義)를 버리고 록(祿)을 따르니...

○○○○ 헤멘다네.

 

관란정 유허비기 해설


아아 이곳은 옛날 학사 원선생의 관란정이 섰던 옛터이다.

선생은 우리 세종4년(142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종조에는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단종조 초에는 병으로 사면하고 원주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물러나게 되자 선생은 그 강 상류로 가서 흙을 모아 대(臺)를 쌓고 나무로 정자를 지어 날마다 그 위에 올라가서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뫼시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밭에 물주고 김매어 채소 과일을 얻어서 빈 박통에 넣어서 수시로 강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선생은 묘소 곁으로 가서 여막(廬幕)을 짓고 피눈물을 흘리며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하며 절하고 3년 상을 치른 다음 원주 霧港으로 돌아가서 방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조카인 원성군 효연이 광묘(世祖朝)의 공신이었는데 하인들을 물리치고 문앞에 서서 공을 뵙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들이지 않았으며 광묘가 특히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지만 죽기를 한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가 일생을 마치니 이는 莊陵(端宗廟)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찌기 선생이 정자에 계실 때에 이웃에 과부가 있어 남의 빨래를 해 주느라 날마다 강가에 가면 언제나 선생이 먼저 나와서 정자위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내가 우리 옛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니 그 여인이 이 말을 듣고 울며 말하기를 "제가 젊은 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다가 지내기가 어려워서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려고 생각 하였는데 지금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미천한 마음이 슬프고 미안합니다" 하고 그만 정절을 지키겠다고 한다. 어리석은 남녀라도 선생의 절의를 듣고는 감격하고 공경하여 사모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고 하거나 나약한 사람에게도  변하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올해 병자년(단종3년)은 지극히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데 선생은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그 일을 알고 초연하게 멀리 떠나갔으니 벌써 큰 선비의 명철함을 보였으며 나중에는 또 절개를 다하고 뜻을 이루어서 군신간의 의리를 다 하였으니 六신에게 비하여 이른바 길은 달라도 뜻은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에 기미를 알고 처신한 일에 관해서는 알 수 있으나 나중에 절개를 다하는 일은 기록이 흩어져서  자취가 없으니 알기가 어려운 일이다. 저 기자의 명이(明夷)의 가르침이야 말로 여기에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선생의 휘는 호(昊)요, 자는 자허(子虛)이다. 불행한 때를 만나서 손수 그가 저술한 詩와 글을 불사르고 자취를 숨겼기 때문에 사적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숙묘 二四년 무인(1698년)에 莊陵을 추후 복위하고 당시의 절의있는 선비들을 표창하였는데 특별히 선생의 집을 정표(旌表) 하였으며 또 원주의 운곡서원과,  함안의 서산서원에 향사 하였다. 그리고 정조八년 갑진(1784)년에는 시호(諡號)를  내리어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영월사람들이 선생의 절의를 사모하는 마음 금할 길 없어 관란정 유허에 표하고 글을 지어서 그 높은 자취가 깨지지 않게 하려는데 선생의 방손 우손(羽孫)이 그때 원주수령이 되어 재물을 준비하고 돌을 다듬어 감사 심진현(沈晋賢)이 찬조하여 이루고 사람을 급히 보내어 내게 글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찌기 선생의 절개를 높이 추앙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여 온지 오랜 터이라 그 전말을 적고 가사를 뒤에 붙이는 바이다.

 

청령포 물위에 흰 구름 일산(日傘) 같은데

큰 새있어 슬피 울고 그 앞에 온갖 새날아 들어 절 하는구나

전에 놀던 그 왕손 한번가고 소식 없는데

봄풀만 해마다 나서 마냥 우거지어라

정자와 바위 물가에 섰는데 물 흐르고 사람간지 몇 해인가

저 물이 끝없이 흐르듯 님의 이름 길이 전하오리

 

숭록대부 원임이조판서 겸판의 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五위도총부도총관 홍양호 지음.

 

 

 

 

단종 임금의 유배지

 


천만리 머너먼 길 고은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험준한 산령들을 받들고 그 품안 구비 구비 비단결 같이 맑게 흐르는 계곡들, 절경에 묻혀 천하비경에 취하는 그 마음이 선하디 선한 사람들이라,... 지금은 박물관 고을이라는 문화의 체취가 풍성한 영월 땅, 자연과 테마문화가 공존하는 시대의 혜택을 누려봄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자그만치 5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조선시대의 비운의 임금님, 그 단종의 슬픈 사연을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우리는 늦었지만 죄송한 마음으로 그의 애사의 흔적을 찾아보려한다.


어린나이 열 두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끝내는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감당했던 단종임금.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유유히 흐르는 서강에 한 폭의 아름다운 섬처럼 노송의 군락지 절경을 바라보는 느낌도 가질 수 있겠으나 그 이면을 안다면 단종의 비애에 심한 울분까지 치밀어옴은 어인 일인가?!


단종임금은 고려왕조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1392년 7월17일, 34대를 거치는 470여년의 고려왕조를 개창하여 국호를 518년 새 역사가 시작되는 조선이라고 세운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의 뒤를 이어 6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성군이라  불려지던 세종조의 뒤를 이었던 문종이 병약하여 재위 2년 3월말에 승하하고 세종 23년(1441년) 7월23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원자로 태어난 열두살이던 세자흥위가 임금에 즉위하게 된다.


그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40여년 받아왔던 고려시대의 외교정책이 조선에 와서도 이어지게 되다가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본토의 명나라가 부상됨으로서 친원, 친명의 두 세력노선의 갈등축이 생기는 조선 초의 정치상황은, 친원파인 정몽주, 이인임들을 제거하게 되며 정도전, 조준등과 함께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한 개혁정치에 힘을 얻어 나라가 운영되는듯하기도 했으나, 고려의 왕실을 옹호하던 구세력들의 저항에 또는 왕씨들을 두려워했던 후환 때문에, 그리고 또 태조의 후임자를 노리는 자식들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극까지 치른  정안군(방원)이 아버지 태조의 건국을 도왔던 정도전까지 제거하여 결국은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간곡한 청을 하게 되면서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영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태조의 퇴위와 정종의 즉위로 정국은 일단 안정의 기미를 보이는 듯 했으나 또 한양천도를 반대하고, 개성의 안주를 은근히 바랐던 관민들과 도성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챙겨 이사 가는 통에 성문을 닫아야만 되는 불안이 이어지기도 했다.


생각치도 않았던 세자의 자리나 왕위까지 오르게 된 영안군(방과) 정조임금은 정안군(방원)이 휘두른 칼날에 방석 방번을 죽여 적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상소대로 태조한테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도성 내에서는 잦은 변고와 괴담까지 생겨 인심이 흉흉해지던  가운데 정조2년에 제2의 왕자의난(회원군 방간의 난)으로 세자책봉을 서두르게 된 정종임금은 내가 적장자라 하여 전위 받았지만 3년 동안에 민심이 미흡하고 재변이 자주 일어나 나의 부덕의 소치임을 알고 원래부터 앓던 풍질을 치료할 겸 그만 정안군을 세자로 삼고 정치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초심대로 정종 2년 11웡13일에 정식으로 왕위를 선양하는 조선조 제3대 태종(방원)임금이 계승되는 것이었다.


실로 태종은 고려 우왕 9년(1383년) 16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에 이를 정도의 벼슬을 하기도 하다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을 함께 했던 장본이기도 하다. 영기와 예지까지 있어서 태조가 무척이이나 신임하고 있었으나 개국 후의 태조 7년째에 왕세자가 셋째인 방석에게 돌아가자 방원이 주동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이 참해되고 또 정종 2년에 제2의 왕자의 난까지 일어나자 정종은 상왕인 태조에게 정안군을 세자로 삼자고 할 때 “하여도 될 수 없고 안하여도 될 수 없다”는 심경을 내 보이며 “이제 무엇을 선위하란 말이냐 벌써 해 놓고서” 하는 불편함을 내기도 했지만 역사는 골육상쟁을 거치면서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405년에 한성(漢城)으로 환도하여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태종임금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이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도 잘 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장자인 양녕을 14년간 세자에서 있었던 자리도 폐위시키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했을 때는 태종자신이 다섯째 왕자로 태어났던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했던 경험을 했던 처지여서 이왕이면 정통성을 세우려했던 장자에서  부국강병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구가할 왕권계승을 더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자로 다시 책봉 된 충녕은 2개월 만에  동양의 성군이라 불러지는 조선조 제4대 세종이 되게 된다.


스물두살에 즉위하여 32년간(1418~1450) 재위하는 동안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외교등 여러 방면에서 선정을 베풀고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여 집현전을 두어 정음청을 설치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서적을 편찬하게 된다. 또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두어 농업개량에 크게 기여했으며 세종이도는 직접 측우기를 고안하고, 장영실, 이천등에게는 해시계, 물시계, 천체를 측정하는 역서를, 박연에게는 음악의 악보를 제작케 했으며 조선을 내침하여 혼란케 하던 해적의 소굴 대마도를 정벌하고 두만강, 압록강 일대를 다시 복구하는 큰일을 해내여 국방을 견고히  하시기도 했다.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지며 태평성대 해지려 할 즈음 세종32(1450년)에 세종이 서거하자 8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문종(향)은 37세 때 조선왕조 제5대 임금이 된다.


조선의 개국 당시부터 적장자가 왕위계승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말처럼 2대의 정종은 둘째, 3대의 태종은 다섯째, 4대의 세종은 셋째가 되었다가 이번 제5대 째에서야 처음으로 적장자가 왕위계승을 하게 된 셈이다.


문종은 세종32년의 통치중의 25년이 되던 해에 부터서 8년간이나 섭정을 하도록 하여 문종의 정치는 세종정치의 연장이라 할 수도 있겠다.


비록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왕위에 있었지만 언로가 넓혀지는 일을 했으나 병약한 문종이였기에 왕권은 세종조와 같지는 못했다. 그래서 문종의 집권기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종친들이 강성해 졌고 김종서, 황보인등의 신하들 세력 간에 복잡한 정치적 마찰이 노출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강력한 리더의 군주라기보다는 덕치로 일관했던 문종은 그나마 재위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그래서 세종조때 8세의 나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던 홍위(단종)를 가리키며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등에게 “나를 섬기듯 세손을 섬기라”고 세손을 부탁하기도 했다.


세종32년(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할 때 홍위는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병약했던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또 승하되자 홍위세자는 12세에 조선조 제6대인 단종임금에 오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20세 이하인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왕실의 가장 높은 서열의 후비(后妃)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단종 곁에는 단종의 모후 권씨는 단종을 출산한지 3일만에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 귀인홍씨와 양씨 두 사람이 있었으나 이들은 후궁이었기에 않되고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양씨가 있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워낙 없다보니 단종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등의 고명대신들의 정승에 의해서 국가가 운명되었다. 조선건국이후 왕권중심 정치에서 신하중심정치 체제로 변천하게 된 셈이다. 불행하게도 김종서, 황보인들은 독단을 부리다 보니 자연히 신하들 간에도 불평이 생기게 되고 또한 세종의 아들인 둘째 수양대군이나 셋째 안평대군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그들이 보였다.


건국초기 정도전이 주장했던 신권정치의 이상이 정안군 이방원에게 제거되면서 태종이 즉위하고는 철저하게 왕권정치체제로 구축되었다가 다시 허후를 통하여 실현되는 듯하다가 김종서, 황보인, 정분등의 3정승의 과욕이 결국은 야심을 품고 있었던 수양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이미 문종시대부터 국정에 참여했던 수양은 1452년 5월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심복인 권람 한명회들과 정권장악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즈음 명나라에서는 단종을 임금으로 임명한다는 고명(誥命)과 비단을 보내와서 그 답례로 수양은 사은사(謝恩使)로 갈 것을 스스로 자청하여 수양은 사은사로서 신숙주를 종사관으로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김종서의 아들김승규를 데리고 가면서 권람, 한명회에게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라는 당부를 하고 명나라로 떠나면서 정적들의 자제를 대동하여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았던 신숙주를 포섭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황보인, 김종서등 문신들과 제휴하여 수양대군측의 무신들과 맞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럴 때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없어서 인사정책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시행하는 일로서 대신들이 인사대상자의 이름에 황색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을 보고 낙점하는 방식을 쓰다보니 국정운영은 형식에 그칠 뿐 모든  실질적인 행사는 대신들이 하게 된 꼴이었다.


명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수양은 1453년 2월에 이 황표정사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래서 황표정사를 고수하던 안평대군과 마찰을 노골적으로 빚게 된다. 그래서 수양은 자기의 야망을 실현하기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 황보인등을 1453년 10월10일에 척살하게 되는데 이때가 계유년이라해서 계유정난이라 불리게 된다. 이렇게 문종의 총애를 받던 고명대신들은 일시에 역모죄에 해당하는 죄를 뒤집어쓰고 척살되거나 피살되거나 유배를 가야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수양은 단종의 이름을 빌어 온갖 전횡을 휘두르며 안평대군까지 유배를 보냈다가 사사시키고서는 스스로 영의정부사겸 판이병조판서겸 내외병마도통사가되어 전권, 병권, 인사권까지 장악하여 자기를 도왔던 정인지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모든 실권을 손에 쥔 후, 계유정난에 성공한 43명에게 정난공신 칭호를 주며 후한 하사품까지 내렸다.


이렇게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추종하던 모든 세력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다음 2차로 남은 정적들을 제거하기위하여 귀양을 보내거나 살해했다. 이때 금성대군도 유배를 가게 된다. 단종은 모든 권한을 상실하여 왕으로서 왕의 지위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수양대군에게 선위한다. 조선조 제7대 임금에 수양이 세조임금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조 때 부활하던 의정부서사제도가 폐지되고 왕권을 강화하는 육조직계제가 다시 도입되면서 집현전 출신과의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왕조에서 몰아내어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노력했다. 명분은 세조가 불의의 찬탈에 저항에서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내용이었지만 유신들의 속내는 또 다른 신료체제를 찾겠다는 뜻이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집현전 학자들은 특히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았던 고명대신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의하여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권자신, 성승등은 명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는 환영회에서 세조가 상왕단종과 함께 참석하는 기회를 틈타 제거하려던 계획이 한명회가 갑자기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모의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으나 처음 이 일에 모의했던 한 사람 중인 김질은 자기들의 모의가 와해되어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또 이 사실을 잘 역이용한다면 좋은 일이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우찬성으로 있는 자신의 장인인 정찬손을 찾아가 박팽년, 성삼문등이 모의한 내용들을 낱낱이 보고하자 정창손은 곧바로 세조에게 알리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극형을 받게 됨으로서 실패하게 되는데 이 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성승등 무려 120여명이나 되고 박팽년과 허조와 유성원은 자결하고 만다.

 

그런데 세조는 극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능지처참(陵遲處斬)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죽은 시신을 다시 찢어 죽이는 시신거열형(屍身車裂形)으로서 머리는 장대에 끼워 매달고 시체는 8도에 조리를 돌리는 악형으로 1456년 6월7일부터 6월27일까지 8차례에 걸쳐서 시행했으며 자결했던 유성원, 허조, 박팽년에게는 시신거열형으로 두번 죽이는 처형을 내렸다.

 

이때 세조의 가혹한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결했거나 처형된 사람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가르키는 6명의 충신들을 사육신이라 하게 되고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세조의 즉위를 끝까지 반대하고 단종을 추종하면서 평생 동안 충절을 지켰던 김시습, 원호, 조려, 남효인, 이맹전, 성담수등 6명의 충신을 생육신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조는 단종과 깊은 관계가 있거나 그를 돕거나 장애가 되는 사람들은 친형제 종친을 불문하고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래서 동생 금성대군(유)도 순흥에 유배시키고 세종의 후궁으로 출생한지 3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친어머니같이 키운 혜빈양씨와 그의 소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그리고 연장자인 화의군까지 유배시켰다가 결국은 사사된다. 이렇게 단종 복위운동은 일단 끝나는듯 하였으나 영의정 정인지와 좌의정 강맹경 우의정 정창손 좌찬성 신숙주등은 지금도 단종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만일에 병자옥사와 같은 불행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상왕을 멀리해야 된다고 끊임없이 상소하여 송현수역모사건을 날조해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가게되고 현덕 왕후권씨는 그의 친정어미 최씨가 역모에 가담했다 하여 종묘에서 제향받을 수 없다며 서인으로 만들고 문종과 함께 위패까지도 태워버렸다. 결국은 세조는 1457년 6월22일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첨지충주원사 어득해가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노산군을 영월로 호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금성대군은, 단종을 보필할것을 어기고 양위찬탈을 한 수양대군을 못 마땅히 여긴 김종서 황보인등의 고명대신들과 수많은 신하들이 척살되거나 귀양 보내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안평대군까지 사사되고 금성대군은 처음 유배지 삭녕에서 광주를 거쳐 순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순흥의 순흥부사 이보흠은 집현전 박사출신으로서 금성대군과 자주 만나는 동안 금성대군의 의분과 충성에 감동을 받아 밤 새워 이야기도 곧잘 하다가 나중에는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에 결의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금성대군의 오랜 수발을 들었던 "금연"이라는 몸종이 순흥부사 이보흠을 모시고 오던 종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공명심으로 출세를 해 보려는 종의 꾐에 빠져 “수양대군이 정인지, 신숙주등의 간신배에 빠져 골육상잔하는 옳지 못한 일을 하고,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이것은 천인공노할 일인지라,  천하에 의리 있는 사람들이여, 다 같이 일어나 이 그릇된 일을 바로잡아 단종을 복위케하자" 라는 격문을, 몰래 문갑 속에서 훔쳐다가 종에게 넘김으로서 모든 것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은 노산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성대군은 정인지의 상소를 받들어 사사되고 노산군 또한 10월24일 관풍헌에서 금부도사 왕방연이 전하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