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과有來

충주 미륵리 사지

푸른 솔 / 문규열 2009. 7. 16. 22:52

 

 

 

            미륵리 사지

 

              문 규 열

 

          계곡 마다  경승지요,역사의 흔적이 서려있는 송계리와 미륵리에는

        연풍군 고사리면을 1914년 미륵말,안말,점말,흙벼루등의 마을을

        통 페합 시키면서 미륵리라하고,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충주시 상모면으로 재편입된것을, 현재의 수안보면 동쪽에

        경북문경과 맞닿아 있는 위치에 미륵리는 있다.

 

        미륵리에 있었던 대원사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주자, 그의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건립하였다고 하는

        미륵리 사지는 고려초기의 석굴사원터로서 지릅재,포함산,부봉,하늘재로 둘려쌓여

        있으며 북쪽방향에 있는 월악산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석불상(보물제95호)이 무언가를

        암시하는듯,월악산 영봉과, 5층석탑과, 미륵석불상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특이함을

        발견할수 있다.

 

 

 

        거대한 돌들을 이용하여 높이 6m에 9.8mx10.75m의 규모인 석굴은 경주의 토함산

        석굴과는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듯 하지만,근본적으로 석굴암의 인공석실 사원양식은

        고려때부터 시작되는 양식을 가졌기 때문에 귀중한 가치성을 지니고 있다.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과, 지방문화재 제19호인 석등과, 제33호인 3층석탑과, 상상을

        초월하는 귀부와,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일명;여의주)과, 쓸어저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를 보고 사찰의 크기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또한, 미륵리 사지에는 고려 명종22년(1192년)에 대원사라 불려졌던 사찰이였으며,

        9~10세기경의 막새기와와 글씨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궁예나 왕건이 지었을 것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발굴조사때 나왔던 불에 그을린 석조불상이나, 타다남은

        목조기둥들이, 몽고와의 전쟁때의 고려 고종25년(1238년)이나 43년(1256년)사이에

        불에타 없어졌을것이라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사실하나는 3층석탐 밑 사지에

        땅을 파 보면 쌀이 나온다는 말에 큰 사찰이었을것이라고 가늠해본다.

 

        그리고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커다란 불상의 하나이며, 불상조각은

        다섯조각으로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팔각형의 돌 하나는 머리위에 갓처럼

        얹힌 10.6m 입상불 인것이다.

 

        또 미륵리사지로 가는 길에는 지명(地名)도 다양하게 아름답다.

        고려때 까지 대원령이라 부르던 것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경관음에서 들어오던

        대원령을 "하늘재"라하고, 수안보를 넘는 고개를 "지릅재", 송계리를 넘어 남한강 뱃터로

        가기위해 하룻밤을 묵어가는데에 닷돈이 들어야 넘는다는 "닷돈재"등 재미있는 전설과,

        송계계곡은 임란때 전국의 승병들이 구국을 위한 청의를 한 곳이기도 하며, 일본의 선봉장

        가등청정이 충주를 점령하기 위한 염탐꾼들을 놓아 보낼때마다 송계에서 붙잡혔다 한다,

        그래서 가등청정은 역서를 잘 이는 누이에게 물어본즉 소나무"송"자가 들어가는 고을은

        피해가라는 말을듣고 송계리는 피해 갔기때문에 전혀 전흔(戰痕)이 없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