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과有來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와 옥소(玉所) 권섭(權燮)

푸른 솔 / 문규열 2009. 5. 8. 20:17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와 옥소(玉所) 권섭(權燮)

/ 문 규열

 

위치;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33번지

지정번호: 지방기념물 제 18호(1977년 12월1일 지정)

시대: 조선

 

1726년(영조 2년)에 창건 된 황강영당은 이듬해에 사액서원 되었으며

1871년(고종 8년)에 철폐되었다.

본래는 한수면 황강리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수암사는 권상하가 살았던 사당이며 수암과 함께 문전공 송시열, 문순공 한원진, 문헌공 윤봉구, 이조참판 권욱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1797년(정조 21년)에 세운 “황강서원 조성비”와 1727년(영조 2년)에 세운 “수암선생구택비”가 있다.

 

권상하는 164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660년(현종 1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온나라가 당쟁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수암과 한수재라는 호를 지어 주었던 스승인 우암 송시열을 따라 화양동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던 중, 송시열이 1675년(숙종)에 자의 대비의 복상(服喪)문제로 추죄를 받아 유배를 가게 되자 35세가 되던 해 황강리로 이사하게 된다.

 

오로지 강학에만 집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큰 업적을 남기는 “한수재집”을 지어서 교과서처럼 읽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은 곧 유명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 부르는 한원진, 이간, 이이근, 채지홍, 한상벽, 윤봉구, 성만징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 “아니다”의 “인물성동이론”의 학설을 가지고 성리학의 논쟁으로 더 유명해 졌다. 대체로 조선의 성리학은 포은 정몽주로부터 시작하여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퇴계 이황으로 이어 지지만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 사상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기호학파의 영남학파로 크게 나누어 지게 된다.

 

율곡이이의 학풍을 이어간 학자들이 주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호서지방(의림지를 기준으로 하여 서쪽지방) 학자들을 가르켜 기호학파라 부르게 되고, 퇴계 이황을 따르는 경상도 학자들을 영남학파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암 권상하는 이러한 학파에 얽매이지 않고 두 학문을 존승했다. 공자를 만세의 어두움을 밝혀준 성인으로서 도(道)를 일월처럼 빛나게 해 준 성현으로 주자를 평하였고, 송시열의 적통을 이어 여러 학자들의 설을 모아 집대성 했던 것이 “한수재집”인 것이다.

 

그리고 1680년(숙종 6년)에 남인(南人)들이 실각하고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풀려나자 다시 화양동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주자의 저술들을 헤아리고 교정보던 중 1689년(숙종15년) 기사환국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귀향을 보내다가 국문을 받기위해 압송되던 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이때 권상하가 정읍으로 달려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릴 때, 송시열은 권상하의 손을 잡고 당부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하여야 하고, 사업은 효종의 대의를 주로 해야 한다”

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화양동에다 만동묘를 세우고 창덕궁 옆 비원에 대보단을 설치하고는 평생을 황강리에서 보내며 “삼서집의”를 짓고, 81세까지 사시는 동안 우의정, 좌의정까지 제수를 받았으나 끝까지 고사하고 산림처사처럼 살다 가셨다.

 

이처럼 수암 권상하는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평생을 바치는 중에 조카인 옥소 권섭을 교육하게 된다.

권상하의 동생이며 옥소의 아버지 권상명이 33세에 요절을 하자, 옥소가 5~10세까지 5년간, 14세~25세까지(11년간), 43세~47세까지 4년간 등 20년간의 가르침을 받는다.

물론 백부와 조카사이에 이루어지는 열 다섯 권의 강상찰(江上札) 속의 내용처럼 스승 격이 되었으며 옥소는 수암을 위해 ‘황강 구곡가’를 짓게 된다.

황강구곡가의 유허지는 모두가 황강서원과 청풍일대를 배경삼고 수암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강구곡가’는 총 10연으로 이루어진 연시조로서 백부 권상하의 학풍을 닮은 점을 볼 수 도 있다.

 

총가(摠歌)

하늘이 뫼를 열어 지계(地界)로 밝을시고

천추수월(千秋水月)이 분(分)밖에 맑았어라

아마도 석담파곡(石潭巴谷)을 다시 볼 듯 하여라

 

대암(對岩)

일곡(一曲)은 어드메오 화암(花岩)이 기이(奇異)할 사

선원(仙源)의 깊은 물이 십리(十里)의 장호(長湖)로다

엇더타 일진범풍(一陣軓風)이 갈 데 알아가나니

 

화암(花岩)

이곡(二曲)은 어드메오 화암(花岩)도 좋을시고

천봉(千峯)이 합답(合沓)한데 한(限) 없는 연화(烟花)로다

어디서 견폐계명(犬吠鷄鳴)이 골골이 들리나니

 

황강(黃江)

삼곡(三曲)은 어드메오 황강(黃江)이 여기로다

양양현송(羊羊絃誦)이 구재(舊齋)를 이었으니

지금(至今)의 추월정강(秋月亭江)이 어제론듯 하여라

 

황공탄(皇恐灘)

사곡(四曲)은 어드메오 이름도 혼란할사

탄성(歎聲)과 악위(岳危)가 일학(一壑)을 흔드는데

그 아래 깊이 자는 용(龍)이 도가성(櫂歌聲)에 깨것다

 

권호(權湖)

오곡(五曲)은 어드메오 이 어인 권(權)소리고

이름이 우연(偶然)한가 화옹(化翁)이 기다린가

이중의 좌우(左右)) 촌락(村落)에 살아볼까 하노라

 

금병(錦屛)

육곡(六曲)은 어드메오 병산(屛山)이 금수(錦繡)로다

백운(白雲) 명월(明月)에 옥경(玉京)이 여기로다

저 위에 태수신선(太守神仙)이 네 뉘신줄 몰라라

 

부용벽(芙蓉璧)

칠곡(七曲)은 어드메오 부용벽(芙蓉璧)이 기절(奇絶)할사

백척천제(百尺天梯)의 학려(鶴唳)를 듣자 올듯

석양(夕陽)에 범범(泛泛) 고주(孤舟)로 오락가락 하노라

 

능강(凌江)

팔곡(八曲)은 어드메오 능강동(凌江洞)이 맑고 깊어

금서(琴書) 사십년(四十年) 의 네 어인 손이러니

아마도 일실쌍정(一室雙亭)에 못내 즐겨 하노라

 

구담(龜潭)

구곡(九曲)은 어드매오 일각(一閣)이 그 뉘러니

조대단엽(釣臺丹葉)이 고금(古今)에 풍치(風致)로다

저기 저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인가 하노라

 

이렇게 옥소는 백부를 존경할 뿐 아니라, 대 자연을 사랑하는 심성이 대단하려니와,

시선(詩仙)처럼 일생을 살다, 8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8천여수의 詩를 지었으니,

과연 대문장가가 제천에 깊이 묻혀 계셨음을 대단히 아쉬워하며,

이제라도 우리는 그 분들의 수암과 옥소의 학문과 문학을 사랑하여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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