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림지 산책 (3)
/ 문규열
흐늘거리는 능수양버들 밑을 지나
잠시 땀을 식히려고 새로 지은 우륵정에 올라본다.
조선시대 이방운 화첩을 보면
의림지 둘레엔 수양버들이 휘청거리고 있었고
금원 시인의 “의림지"라는 제목에서는
버드나무 가지위에서 꾀꼬리의 이별을 담은 애닮은 싯귀를 볼 수도 있다.
지금 현재로서는
현판시 한 점 보이지 않는 아쉬움만 가득한 서운함의 눈물이 고인 것처럼 느껴지는
의림호수를 제천의 보배 옥소권섭선생은
중국의 북송시대의 서동파가 만든 “西湖”보다도 훨씬 아름답다고 의림지를 칭찬했었고
또한 제천출신의 박수검이나 김이만도 의림지를 격찬하는 시를 짓곤 했었다.
조선시대의 문필가인 김정희, 조선초의 정인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숱한 분들이 의림지에 대한 시를 남겼다.
그중의 박수검의 시를 소리내며 읊어보자.
우륵(于勒) 신선이 자신지
천년이 되었건만
호수와 산은 그대로 있구나
수려한 빛이 그 곳곳에 맺혀 있는데
초가에 살며 이 사이에서 늙어만 간다.
또 추사 김정희는
짙게 바른 가을 산 그린 눈썹 흡사한데
둥근 못은 푸른 유리 골고루 깔았구려
작고 큰 것 끌어들여 제물을 논한다면
꼭 연산이 묵지를 감돌았다 말을 하리
또한 여류시인인 금원도
못가의 버드나무
실실히 두리워
애궂은
봄 시름을 제가 아는듯
가지위의 꾀꼬리
쉼없이 울어
님 보내는
슬픔을 겨워하나니
라고 시를 지었으며
노산 이은상 시인도
의림지 봄 버들아래
공어회를 즐긴다는데
나는 왜 가을바람에
낙엽을 밟고 왔나
같은 봄, 안누리는 뜻을
구태 묻지 마시오
이렇게 의림지를 애찬하는 시인묵객들이 많았음에도
그 흔적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시어(詩語)들이 없음은 유감스럽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의림지 전설 속에서 며느리가 돌로 변했다는 그 바위는
연자바위가 아닌지 하고 생각에 잠겨본다.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 고구려의 왕산악과 신라의 우륵과 조선의 박연 중의 한분이셨던 우륵선생께서
애련리의 장금터(선암마을)와 이곳 의림지에서 법지 계고 만덕이라는 세 제자에게
노래와 춤과 가야금을 전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성열이현이었던 사람(의성사람들은 가야국의 성열이라고 하고
성열은 곧 사열이를 뜻하는 청풍이기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도 제천 청풍이라 하기도 하여
고증이 불확실하다) 우륵 선생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였던 제천을 함락(551년)했을 때의 낭성(지금의
청주)에서 우륵의 음악을 듣고는 산수가 어우러진 충주를 국원소경(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이라
정하고음악을 좋아했던 진흥왕은 우륵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야금에 전념케 했던 그 시절에 우륵선생은
경관이 뛰어난 의림지에 와서 우륵당을 짓고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연자바위에 걸터앉아 음악을 즐기지
않았을까, 그러다가도 목이 마르면 우륵정에서 약수를 마시듯 갈증을 해소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우륵선생과 의림지의 인연도 깊은 곳이요,
조선 숙종 때 문장가였던 박수검은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페위 되자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던 관계로 벼슬을 버리고 자칭 임호처사라고 하기도 했던 인물로서
이 고장을 퍽이나 아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고장 제천사람들은
1827년 순조(527년)때 의호사를 창건하고 제향 했던 사실이 있던 의림지이기도 하다.
임진란 때는 스승(안승우)를 따라 조국을 위해
19세에 목숨을 초개처럼 기꺼이 바쳤던 홍사구소년장군묘가 옛 우륵당위 쪽에 있었다가
지금은 고암동으로 옮겨졌지만 의림지는 의병축제를 벌이는 제천 역사를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울창한 노송 숲에 휩쌓인 영호정이나 경호루가 더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제천의 젖줄이요,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명승이 곁들여진 제천 제1경이 걸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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