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과有來

방랑시인 난고(蘭皐) 김삿갓을 찾아가다

푸른 솔 / 문규열 2008. 6. 2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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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고(蘭皐) 김삿갓을 찾아가다


               

                                                                              / 문규열


죽장(竹杖) 하나에 허름한 삿갓을 쓰고 개나리봇짐을 메고서는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유람하면서,

 당시의 부패한 양반귀족들을 조롱하며 죄악과 비인도적 처사를 풍자화 했던 방랑시인 김삿갓.

그의 숨결이 묻어나는 詩공원과 문학관을 찾아보려 영월군 하동면 와석 계곡에 들어선다.


박물관 고을이라는 말이 어울리게끔 14곳 (화석박물관; 주천면 판운리. 곤충박물관: 북면 문곡리. 책 박물관:

서면 광전2리, 김삿각문학관: 하동면 와석리, 묵산미술관: 하동면 와석리, 조선민화박불관: 하동면 와석리,

동강사진박물관: 영월읍 하송리, 청전전각박물관: 하동면 와석리, 호야지리박물관: 수주면 무릉3리,

다구박물관: 하동면 내리, 단종역사관: 영월읍 영흥리, 별마로 천문대: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국제현대미술관: 영월읍 삼옥리, 술샘박물관: 주천면) 중의 4개의 박물관이 이곳 와석에 밀집되어 있어서

테마체험에 상당히 흥미를 갖게큼 되어있다.


단종의 얼에 깊은 연심(戀心)을 갖다가 김삿갓의 詩心에 끌리어 와석초입에 들어서자 마자 이상한 유혹에

이끌림당하는 기분으로 사로 잡힌다. 조금은 인위적이다 싶은 돌탑들의 안내를 받으며 몇구비를 돌아서 아스팔트길을

막고 서 있는듯한 바위 건너편에 6폭 병풍밑 松林으로 가득한 친자연림 속에있는 묵산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와야의 출렁다리를 밟고서, 댕기머리 묵산관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곱고 낭낭한 큐레이터의 고미술, 현대미술,

세계아동미술전시관들을 돌아보면서, 관람하는 해설 맛에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몇 시간이 흐른 뒤 시장끼를

느낄 정도의 미술 감상에 푹 빠져있었음을 늦게서야 알게 되는 곳이다.


상류 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좌측 언덕위의 조선 민화박물관이 정겹게 인사한다.

묵산미술관에서와는 색다른 민화미술에 취할 수도 있다.


또 옛날에는 송어양식장이 있었던 곳에서 나의 애마가 계곡을 건너가다 수심에 빠져 시동이 꺼져버렸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벌써 20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유수와 같음을 실감한다. 결국은 큰 차에 견인 받아 

돌아왔지만 분명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지금은 김삿갓 유적지로서 대형버스들이 다녀가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그때는 묘소와 생가만 덜렁 있었을 뿐

詩碑한 점 없었던 때였던지라, 문학관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 시절에, 나는 난고의 흔적을 찾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박물관 그 자리에 어느 촌노한테서 토종닭을 부탁하여 시꺼먼 꽁보리밥에 곁들여 먹었던 그때가 새록새록

회상되어 지금도 목구멍에서 생침이 꿀꺽꿀꺽 넘어가는 군침이 인다.


문화와   유적이 함께 어우러져 숨 쉬고 있는 와석계곡, 밤이 되면  유난히도 초롱초롱한 별들이 총총히 모여들어

 금방 쏟아질 것처럼 맑다. 그래서 그랬을까,난고는 일찍이   방랑시인에 걸맞게 이 청정오지를 택하지 않았을까.

별들과는  벗해도 밝은 하늘을 감히 볼 수 없었다던 속죄양이 된 입장에서, 초목을 안방처럼 이슬을 이불처럼 생각하고

허기진 배를 체워주던 고염과 돌배.산밤들을 끼니로 대신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운명이 어떠했길래

방랑의 삶을 사셨을까?!

 

 


난고 김삿갓은 本名이 김병연이다.

1807년 3월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께서 선천부사로 계시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막강했던 그 시절에 성리학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과정에서 평안도 농민전쟁인

홍경래난이 일어나자 할아버지인 김익순부사는 홍경래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구걸하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차후 진압군에 홍경래의 세력은 몰락하고  그 이듬해에 김익순 선천부사는 죄를 물어 처형당하면서 그의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당시에 여섯 살 이였던 김병연은 형 병하와 함께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잠시 머물기도했다. 그 후, 김익순의 문죄는 본인에게만 국한된다는 조정의 결정이 내려지자, 여덟살이 되던해에

 어머니와 함께 강원도 영월의 삼옥으로 이사하여 어머니의 권유로 어렵게 공부하면서 정착했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영월도호부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하는 試題로 즉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는 응시에 장원하였으나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을 알게 되는 난고는 심한 번민에 빠지게 된다. 할아버지를 욕되게 한 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는 첩첩산골인 어둔으로 이사하였으나 결국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고 25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


처음엔 지방토호들이나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으나 나중에는 서민들과 함께 지내며 재치와

해학으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내다가 쉰일곱이 나던 해 1863년 3월29일

(철종14년) 전라도 화순군 동복에서 세상을 하직할 때 까지 인간사의  모든 것들을 詩題로 써서 이중적 어법을

사용하는 풍자시를 지었으며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서민문학에 큰 업적을 남기셨다.

 

 

 

경치 -

한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은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이 꽃이 피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죽 한그릇-

네다리 소나무상에 놓인 죽 한 그릇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노닐고 있네

주인이여 무안해 하지 마오

나는 청산이 물에 거꾸로 비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오


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모두 너를 환영하고

나라와 집을 흥하게 하니

네 힘이 범상치 않구나

갔다가도 다시 오고 왔다가도 다시 가니

산사람도 능히 죽이고 죽는 사람도 살리는구나


 

 난고선생은 풍자해학뿐만 아니라 경제와 자연환경에도 섭렵한 시를 쓰셨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아들 익균이

 지금의 와석으로 모셔 와서 장사를 지낸 후, 지금은 서예가와  조각가들의 작품들이 공원을 이루는 형태가 되었다.

 또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는 평생을 김삿갓 연구에 몸을 바치신 정암 박영국의 연구자료들과 金玉,黃錄此集,東國詩,

 必携集,海東詩選,大東埼聞,大東詩選등 과 1939년 이응수 作의 김립시집 이외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전시되어 있다.


 곡동천이라 부를 만큼 깨끗한 물이 항상 흐르고 울창한 숲속에 문화가 공존하는 계곡,

 삿갓선생으로 하여금 테마가 곁들여진 문화에 마음은 그지없이 풍성하지만 유기앵소(柳枝鶯巢)라 할까, 버드나무

 가지위에 꾀꼬리 형국을 닮은 유적지엔 쓸쓸함이 남는 것은 어인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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