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과有來

단종 임금의 유배지 청령포

푸른 솔 / 문규열 2008. 10. 1. 14:14

  

단종 임금의 유배지 청령포


   문규열



천만리 머너먼 길 고은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험준한 산령들을 받들고 그 품안 구비 구비 비단결 같이 맑게 흐르는 계곡들, 절경에 묻혀 천하비경에 취하는 그 마음이 선하디 선한 사람들이라,... 지금은 박물관 고을이라는 문화의 체취가 풍성한 영월 땅, 자연과 테마문화가 공존하는 시대의 혜택을 누려봄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자그만치 5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조선시대의 비운의 임금님, 그 단종의 슬픈 사연을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냥 보낼 수 없기에 우리는 늦었지만 죄송한 마음으로 그의 애사의 흔적을 찾아보려한다.


어린나이 열 두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끝내는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감당했던 단종임금.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유유히 흐르는 서강에 한 폭의 아름다운 섬처럼 노송의 군락지 절경을 바라보는 느낌도 가질 수 있겠으나 그 이면을 안다면 단종의 비애에 심한 울분까지 치밀어옴은 어인 일인가?!


단종임금은 고려왕조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1392년 7월17일, 34대를 거치는 470여년의 고려왕조를 개창하여 국호를 518년 새 역사가 시작되는 조선이라고 세운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의 뒤를 이어 6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성군이라  불려지던 세종조의 뒤를 이었던 문종이 병약하여 재위 2년 3월말에 승하하고 세종 23년(1441년) 7월23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원자로 태어난 열두살이던 세자흥위가 임금에 즉위하게 된다.


그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40여년 받아왔던 고려시대의 외교정책이 조선에 와서도 이어지게 되다가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본토의 명나라가 부상됨으로서 친원, 친명의 두 세력노선의 갈등축이 생기는 조선 초의 정치상황은, 친원파인 정몽주, 이인임들을 제거하게 되며 정도전, 조준등과 함께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한 개혁정치에 힘을 얻어 나라가 운영되는듯하기도 했으나, 고려의 왕실을 옹호하던 구세력들의 저항에 또는 왕씨들을 두려워했던 후환 때문에, 그리고 또 태조의 후임자를 노리는 자식들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극까지 치른  정안군(방원)이 아버지 태조의 건국을 도왔던 정도전까지 제거하여 결국은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간곡한 청을 하게 되면서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영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태조의 퇴위와 정종의 즉위로 정국은 일단 안정의 기미를 보이는 듯 했으나 또 한양천도를 반대하고, 개성의 안주를 은근히 바랐던 관민들과 도성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챙겨 이사 가는 통에 성문을 닫아야만 되는 불안이 이어지기도 했다.


생각치도 않았던 세자의 자리나 왕위까지 오르게 된 영안군(방과) 정조임금은 정안군(방원)이 휘두른 칼날에 방석 방번을 죽여 적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상소대로 태조한테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도성 내에서는 잦은 변고와 괴담까지 생겨 인심이 흉흉해지던  가운데 정조2년에 제2의 왕자의난(회원군 방간의 난)으로 세자책봉을 서두르게 된 정종임금은 내가 적장자라 하여 전위 받았지만 3년 동안에 민심이 미흡하고 재변이 자주 일어나 나의 부덕의 소치임을 알고 원래부터 앓던 풍질을 치료할 겸 그만 정안군을 세자로 삼고 정치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초심대로 정종 2년 11월13일에 정식으로 왕위를 선양하는 조선조 제3대 태종(방원)임금이 계승되는 것이었다.


실로 태종은 고려 우왕 9년(1383년) 16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에 이를 정도의 벼슬을 하기도 하다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을 함께 했던 장본이기도 하다. 영기와 예지까지 있어서 태조가 무척이이나 신임하고 있었으나 개국 후의 태조 7년째에 왕세자가 셋째인 방석에게 돌아가자 방원이 주동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 방석이 참해되고 또 정종 2년에 제2의 왕자의 난까지 일어나자 정종은 상왕인 태조에게 정안군을 세자로 삼자고 할 때 “하여도 될 수 없고 안하여도 될 수 없다”는 심경을 내 보이며 “이제 무엇을 선위하란 말이냐 벌써 해 놓고서” 하는 불편함을 내기도 했지만 역사는 골육상쟁을 거치면서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405년에 한성(漢城)으로 환도하여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태종임금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이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도 잘 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장자인 양녕을 14년간 세자에서 있었던 자리도 폐위시키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했을 때는 태종자신이 다섯째 왕자로 태어났던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했던 경험을 했던 처지여서 이왕이면 정통성을 세우려했던 장자에서  부국강병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구가할 왕권계승을 더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자로 다시 책봉 된 충녕은 2개월 만에  동양의 성군이라 불러지는 조선조 제4대 세종이 되게 된다.


스물두살에 즉위하여 32년간(1418~1450) 재위하는 동안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외교등 여러 방면에서 선정을 베풀고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여 집현전을 두어 정음청을 설치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서적을 편찬하게 된다. 또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두어 농업개량에 크게 기여했으며 세종이도는 직접 측우기를 고안하고, 장영실, 이천등에게는 해시계, 물시계, 천체를 측정하는 역서를, 박연에게는 음악의 악보를 제작케 했으며 조선을 내침하여 혼란케 하던 해적의 소굴 대마도를 정벌하고 두만강, 압록강 일대를 다시 복구하는 큰일을 해내여 국방을 견고히  하시기도 했다.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지며 태평성대 해지려 할 즈음 세종32(1450년)에 세종이 서거하자 8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던 문종(향)은 37세 때 조선왕조 제5대 임금이 된다.


조선의 개국 당시부터 적장자가 왕위계승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말처럼 2대의 정종은 둘째, 3대의 태종은 다섯째, 4대의 세종은 셋째가 되었다가 이번 제5대 째에서야 처음으로 적장자가 왕위계승을 하게 된 셈이다.


문종은 세종32년의 통치중의 25년이 되던 해에 부터서 8년간이나 섭정을 하도록 하여 문종의 정치는 세종정치의 연장이라 할 수도 있겠다.


비록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왕위에 있었지만 언로가 넓혀지는 일을 했으나 병약한 문종이였기에 왕권은 세종조와 같지는 못했다. 그래서 문종의 집권기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종친들이 강성해 졌고 김종서, 황보인등의 신하들 세력 간에 복잡한 정치적 마찰이 노출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강력한 리더의 군주라기보다는 덕치로 일관했던 문종은 그나마 재위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그래서 세종조때 8세의 나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던 홍위(단종)를 가리키며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등에게 “나를 섬기듯 세손을 섬기라”고 세손을 부탁하기도 했다.


세종32년(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할 때 홍위는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병약했던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또 승하되자 홍위세자는 12세에 조선조 제6대인 단종임금에 오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20세 이하인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왕실의 가장 높은 서열의 후비(后妃)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단종 곁에는 단종의 모후 권씨는 단종을 출산한지 하루만에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 귀인홍씨와 양씨 두 사람이 있었으나 이들은 후궁이었기에 않되고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양씨가 있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워낙 없다보니 단종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등의 고명대신들의 정승에 의해서 국가가 운명되었다. 조선건국이후 왕권중심 정치에서 신하중심정치 체제로 변천하게 된 셈이다. 불행하게도 김종서, 황보인들은 독단을 부리다 보니 자연히 신하들 간에도 불평이 생기게 되고 또한 세종의 아들인 둘째 수양대군이나 셋째 안평대군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그들이 보였다.


건국초기 정도전이 주장했던 신권정치의 이상이 정안군 이방원에게 제거되면서 태종이 즉위하고는 철저하게 왕권정치체제로 구축되었다가 다시 허후를 통하여 실현되는 듯하다가 김종서, 황보인, 정분등의 3정승의 과욕이 결국은 야심을 품고 있었던 수양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이미 문종시대부터 국정에 참여했던 수양은 1452년 5월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심복인 권람 한명회들과 정권장악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즈음 명나라에서는 단종을 임금으로 임명한다는 고명(誥命)과 비단을 보내와서 그 답례로 수양은 사은사(謝恩使)로 갈 것을 스스로 자청하여 수양은 사은사로서 신숙주를 종사관으로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김종서의 아들김승규를 데리고 가면서 권람, 한명회에게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라는 당부를 하고 명나라로 떠나면서 정적들의 자제를 대동하여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았던 신숙주를 포섭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황보인, 김종서등 문신들과 제휴하여 수양대군측의 무신들과 맞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럴 때 단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없어서 인사정책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시행하는 일로서 대신들이 인사대상자의 이름에 황색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을 보고 낙점하는 방식을 쓰다보니 국정운영은 형식에 그칠 뿐 모든  실질적인 행사는 대신들이 하게 된 꼴이었다.


명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수양은 1453년 2월에 이 황표정사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래서 황표정사를 고수하던 안평대군과 마찰을 노골적으로 빚게 된다. 그래서 수양은 자기의 야망을 실현하기에  장애가 되는 김종서, 황보인등을 1453년 10월10일에 척살하게 되는데 이때가 계유년이라해서 계유정난이라 불리게 된다. 이렇게 문종의 총애를 받던 고명대신들은 일시에 역모죄에 해당하는 죄를 뒤집어쓰고 척살되거나 피살되거나 유배를 가야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수양은 단종의 이름을 빌어 온갖 전횡을 휘두르며 안평대군까지 유배를 보냈다가 사사시키고서는 스스로 영의정부사겸 판이병조판서겸 내외병마도통사가되어 전권, 병권, 인사권까지 장악하여 자기를 도왔던 정인지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모든 실권을 손에 쥔 후, 계유정난에 성공한 43명에게 정난공신 칭호를 주며 후한 하사품까지 내렸다.


이렇게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추종하던 모든 세력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다음 2차로 남은 정적들을 제거하기위하여 귀양을 보내거나 살해했다. 이때 금성대군도 유배를 가게 된다. 단종은 모든 권한을 상실하여 왕으로서 왕의 지위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수양대군에게 선위한다. 조선조 제7대 임금에 수양이 세조임금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조 때 부활하던 의정부서사제도가 폐지되고 왕권을 강화하는 육조직계제가 다시 도입되면서 집현전 출신과의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왕조에서 몰아내어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노력했다. 명분은 세조가 불의의 찬탈에 저항에서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내용이었지만 유신들의 속내는 또 다른 신료체제를 찾겠다는 뜻이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집현전 학자들은 특히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았던 고명대신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의하여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권자신, 성승등은 명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는 환영회에서 세조가 상왕단종과 함께 참석하는 기회를 틈타 제거하려던 계획이 한명회가 갑자기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모의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으나 처음 이 일에 모의했던 한 사람 중인 김질은 자기들의 모의가 와해되어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또 이 사실을 잘 역이용한다면 좋은 일이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우찬성으로 있는 자신의 장인인 정찬손을 찾아가 박팽년, 성삼문등이 모의한 내용들을 낱낱이 보고하자 정창손은 곧바로 세조에게 알리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극형을 받게 됨으로서 실패하게 되는데 이 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성승등 무려 120여명이나 되고 허조와 유성원은 자결하고 만다.

 

그런데 세조는 극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능지처참(陵遲處斬)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죽은 시신을 다시 찢어 죽이는 시신거열형(屍身車裂形)으로서 머리는 장대에 끼워 매달고 시체는 8도에 조리를 돌리는 악형으로 1456년 6월7일부터 6월27일까지 8차례에 걸쳐서 시행했으며 자결했던 유성원, 허조에게는 시신거열형으로 두번 죽이는 처형을 내렸다.

 

이때 세조의 가혹한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결했거나 처형된 사람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가르키는 6명의 충신들을 사육신이라 하게 되고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세조의 즉위를 끝까지 반대하고 단종을 추종하면서 평생 동안 충절을 지켰던 김시습, 원호, 조려, 남효인, 이맹전, 성담수등 6명의 충신을 생육신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조는 단종과 깊은 관계가 있거나 그를 돕거나 장애가 되는 사람들은 친형제 종친을 불문하고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래서 동생 금성대군(유)도 순흥에 유배시키고 세종의 후궁으로 출생한지 3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을 친어머니같이 키운 혜빈양씨와 그의 소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그리고 연장자인 화의군까지 유배시켰다가 결국은 사사된다. 이렇게 단종 복위운동은 일단 끝나는 듯 하였으나 영의정 정인지와 좌의정 강맹경 우의정 정창손 좌찬성 신숙주등은 지금도 단종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만일에 병자옥사와 같은 불행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상왕을 멀리해야 된다고 끊임없이 상소하여 송현수역모사건을 날조해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가게되고 현덕 왕후권씨는 그의 친정어미 최씨가 역모에 가담했다 하여 종묘에서 제향받을 수 없다며 서인으로 만들고 문종과 함께 위패까지도 태워버렸다. 결국은 세조는 1457년 6월22일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첨지충주원사 어득해가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노산군을 영월로 호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금성대군은, 단종을 보필할것을 어기고 양위찬탈을 한 수양대군을 못 마땅히 여긴 김종서 황보인등의 고명대신들과 수많은 신하들이 척살되거나 귀양 보내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안평대군까지 사사되고 금성대군은 처음 유배지 삭녕에서 광주를 거쳐 순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때 순흥의 순흥부사 이보흠은 집현전 박사출신으로서 금성대군과 자주 만나는 동안 금성대군의 의분과 충성에 감동을 받아 밤 새워 이야기도 곧잘 하다가 나중에는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에 결의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금성대군의 오랜 수발을 들었던 "금연"이라는 몸종이 순흥부사 이보흠을 모시고 오던 종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공명심으로 출세를 해 보려는 종의 꾐에 빠져 “수양대군이 정인지, 신숙주등의 간신배에 빠져 골육상잔하는 옳지 못한 일을 하고,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이것은 천인공노할 일인지라,  천하에 의리 있는 사람들이여, 다 같이 일어나 이 그릇된 일을 바로잡아 단종을 복위케하자" 라는 격문을, 몰래 문갑 속에서 훔쳐다가 종에게 넘김으로서 모든 것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은 노산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성대군은 정인지의 상소를 받들어 사사되고 노산군 또한 10월24일 관풍헌에서 금부도사 왕방연이 전하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결국은 영의정 정인지, 우의정 정찬손, 이조판서 한명회의 상소로 하여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한양에서 수백리길인 강원도 영월 첩첩산중인 청령포로 유배 길을 떠나야만 되었다.


1457년 6월22일 낡은 남여를 타고 종로를 거쳐 동대문을 지날 때는 한양 안의 모든 백성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울었으며, 7일 동안 한양 → 광주 → 여주 → 원주 → 부론 → 주천 → 청령포에 도착 했을 때는 칠월 초생 달이 외롭게 떠 있었다. 삼면이 굽이 쳐 흐르는 육육봉 기슭 밑 서강줄기는 무인고도와도 같아 슬픔과 고뇌의 하루하루를 보내려 망향탑에 오를 때 마다 돌을 하나하나 쌓으며 할아버지인 세종과 아버지인 문종, 왕후 송씨를 그리워하고 김종서, 황보인,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이개, 성승 등 무참하게 살육 된 신하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관음송(觀音松)에 올라 부덕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경복궁을 향해 그리움에 사무치는 피눈물을 흘리기도 할 때, 주위의 백성들이나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는 채소와 산나물들을 청령포로 보내기도 했고 칠월백중절 때는 “삼생부모영가(三生父母靈駕)와 충혼원혼영가(忠魂冤魂靈駕)를 써서 조상들과 죽은 신하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긁은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천병만마를 몰아오는 듯한 큰 비가 되어 어가(어가)까지 몽땅 떠내려갔었다. 하는 수 없이 거처를 관풍헌으로 옮기고 단종은 자규루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퉁소를 불고 시(詩)를 지어 자신을 달래기도 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도다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애닮퍼라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여보소, 세상근심 많은 분네

 부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한은 끝이 없도다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을 어이 듣지 못하는고

 어쩌다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하며 시름에 빠져 있을 때

조정에서는 또, 세조3년(1457년) 9월10일,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 좌찬성 신숙주등이 연좌하여 노산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끝내는 사사하도록 청하며 1457년 10월24일(승정원일기) 사약을 받게 된다.


죽게 된 단종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때 영월고을 이방 아전 엄흥도가 동을지산(冬乙支山)에 묻어 시신을 수습하고는 세조의 후환이 두려워서 단종이 입었던 용포를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로 가서 김시습과 함께 3년상을 치른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중에는 경북 군위면 의흥면에 정착했다.


“한번 영월에 오시더니 환궁치 못하시옵시고

 드디어 홍도로 하여금 두려운 가운데 돌보시게 되었다.

 작은 벼슬아치 육순에 충성을 다하고저 하기를

 대왕은 17세에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

 높이 든 하늘에는 밤마다 마음별이 붉고

 위태로운 땅엔 해마다 눈물비가 붉도다.

 힘없는 벼슬아치로 의를 붙들고 일어서서,

 홀로 능히 이 일을 왕께 돌려드리려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