遺蹟踏査

長樂寺址를 探訪하면서

푸른 솔 / 문규열 2007. 9. 12. 16:06
 

長樂寺址를 探訪하면서

                                        

                                     글/ 문규열


우리는 우리 고장관내에 있는 유적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항상 마음만 있었지 정작 문화유적지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생활도 윤택해지고 마음의 양식까지도 겸비한 문화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제천을 사랑하는 순수한 민간사설문화단체인 제천문화사랑은 지극히 적은 것에서부터 새롭게 역사 지를 찾아보며 회원 상호간에 친목도 도모하고 지식들을 서로 교류해가는 단계로 발전하는가 싶다.


그러면, 오늘은 시내에서 제일 가까운 장락사지를 방문하면서


?제천문화재 현황.

?보물(6): 

  사자빈신사지석탑, 덕주사마애불, 청풍한벽루, 청풍석조여래입상,

  신륵사3층석탑, 장락동7층모전석탑.

    

?유형문화재(23): 

  금남루, 금병헌, 팔영루, 청풍향교, 화동강목판목, 도화리고가,     황석리고가, 후산리고가, 중전리고가, 김세균고가, 지곡리고가,     응청각, 제천향교, 신륵사극락전, 석조관음보살좌상, 석조나한상,    교리방단석조물,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목조아미타여래    좌상(무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백년사), 대불정주범자비, 석    조여래입상(두학), 약사여래입상.

?기념물(10): 

  의림지, 황강영당 및 수암사, 덕주산성, 자양영당, 박약재, 망월산성,

  원호유허비 및 관란정, 점말동굴유적, 입석리선돌, 베론성지.


?무형문화재(1): 

    오티별신제.


?문화재자료(2):

    시곡리석조여래입상, 한산사석조여래입상.


을 되새겨 짚어보며 짧은 지식이지만 요점만을 간추려 본다.


?장락동칠층모전석탑 (보물; 459호- 1967년 6월23일 지정)의 제천은 원래 삼국시대때 백제가 제일먼저 진출하다가 고구려(장수왕 413년 - 491년)가 대대적인 남하정책으로 단양, 제천, 충주, 음성, 괴산, 진천, 등등을 領有하게 되었고, 다시 신라의 북방정책으로 신라 진흥왕(551년)때에는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어서 경덕왕(757년)때, 奈堤郡으로 하  였다.


 다시 고려가 건국되자 940년에는 堤州로 개칭되었으며 985년에 지방   제도가 12목으로 통치되면서 충주목사 관할하의 원주목에 속하게 되고   992년에는 의천으로 불리게 되며 995년에 향정구역이 10도로 개편되   면서 中原道에 속하게 된다.

 또다시 朝鮮이 들어서자 1395년에 충주목과 청주목을합병하여 충청도   로 개칭되었으며 지방 명칭 변경에 따라 堤川으로 변경된다. 현재의    堤川市 청풍면에 속하는 청풍면은 청풍군으로 독립되기도 했던 것은    조선의 현종때 이르러 明聖王后의 貫鄕 (청풍김씨 본향)인 관계로 부   사를 두어 都護府로 승격시키기도 했던 때도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행정구역이 확정된 것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한청풍군과 덕산면 일원이 제천군에 병합되면서인데 1980년 4월1일에 제천읍이 市로 승격되면서 제천군명이 제원군으로 변경되고 다시 제천군으로 환원되다가 1995년에 시. 군이 제천시로 통합되면서 장락사지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의 위치에 있으며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불교문화가 번성할 때(통일신라의 말)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불교문화의 문외한이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만은 그래도 탑은

목탑 (법주사팔상전, 화순쌍봉사대웅전) 전탑 (송림사5층전탑, 안동조탑동5층전탑, 여주신륵사다층전탑. 등등...) 석탑(많은 편)으로 나뉘어 지는데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목탑이 백제의 불교문화라면 석탑은 신라의 문화인데,

장락동칠층모전석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탑을 모방했다하여 모전석탑이라고 하는데 불행한 것은 6.25전란시 폭탄에 의해서 일부가 파괴되고 해마다 기울어져 가게 되니 1967년도부터 1968년도에 걸쳐서 해체 복원하게 되었다.

그때에 백자종편 여러 점과 금동편 3점, 금동불상 1점, 철편 3점, 사리장치석제 1개가 나왔다고 하며 거대한 석탑에 비해 절터가 지극히 협소함을 볼 때 장락사의 쇠락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 탑의 형태를 보자.

회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한 탑은 基壇만은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고 그 위로는 벽돌로 만들어진 칠층의 탑신을 올렸고, 탑신의 감실은 부처의 사리나 불상, 불경 등을 모셔 두는 곳으로 문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남쪽의 것이 없어졌으며, 1층의 네 모서리에 화강암을 다듬어서 기둥으로 세운 것은  점판암과 혼용하여 사용했으니 특이한 점이라 한다.

불교문화의 큰 탑들은 한결같이 지붕들의 네 귀퉁이에는 구멍을 뚫어서 풍경을 달도록 하였는데 장락동칠층모전석탑 역시 같은 방식을 택하였고 탑의 머리가 없어진 것이 아쉬우며,0 장식받침인 露盤이 있는데 그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그 구멍둘레로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목되는 것은 탑신전체에 灰로 발랐던 흔적들이 있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조선태종 때부터 거대한 불교종단 7종(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자은종,)중의 하나였던 천태종의 명찰로서 있었던 점을 생각해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문화재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