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신라적성산성(비) 답사기
글/ 문 규열
매년 봄만 되면 어김없이 고역을 치르게 되는
황사현상은 오늘도 심하게 발생했다.
문명은 발달되는데
중국정부는 황막한 중국서부 사막지대를 녹화 개발할 계획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지...?
기관지 천식을 앓는 사람들에겐
여간 조심을 할 수밖에 없는 기상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날씨에
오늘은 우리 문화사랑가족들이
금년 들어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유적지답사를
제천근처에 있는 단양 신라적성산성(비)로 계획하고 출발했다.
중앙 고속도로가 생기고 상행선 휴게소를 단양적성에다 만든 것은
적성산성 유적지와 관계가 있었다고 소문으로 듣다가
오늘에서야 그 유적지를 답사하게 되니 여간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출발한 일행으로는
이 길우 고문님내외, 이 도행 답사위원내외, 원 상규 문화위원,
김 덕용 사무국장내외와 공주, 그리고 우리내외가 먼저 산성에 도착해서
산성비내용을 관찰하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산성 내에 방치되어 있는 큰 묘지에 대해서는
석제단 까지도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산성과 관련된 큰 유공자의 것인데
천 사오백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 후손들이 어떠한 사유인지는 몰라도
관리부실 되고 있다는 대부분의 견해일치를 내놓으며
주위에 새파랗게 돋아나는 봄나물 췌취에 동행한 부인들은 신이 나고,
각 자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꿀 맛 같은 오찬을 즐기고 있을 때,
이 강래 고문님내외가 합류해 오셨다.
유적지가 소규모인지라
시간이 단축되어서 예정에 없던
영주인삼목욕탕을 들리게 되니 피로를 쏴-악 가시게 했다.
여행이라는 것은 목적의 성과를 거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뜻밖의 먹 거리에 흥이 나기도 한다.
목욕탕에서 땀을 쭈-욱 뺀 후라
삼겹살에 소주한잔 곁들인 맛은 그야말로 일미였다.
참으로 유적지 답사일정은 짧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차후 일정을 더 기다려지게 하면서
이번 답사기 요점을 정리해 본다.
적성산성은(사적 제625호 - 1979년 7월26일지정) 해발 382m 자리에
원래 지명은 고구려의 赤山懸 또는 赤城이였는데 신라가 점령함으로써
제천의 영현(領懸)으로 귀속되다가 차후 제천단양으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단양군 적성으로 이르게 되고 성의 길이는 923m가 되지만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협축 한부부분의 안쪽 벽 높이 2-3m,
폭1m의 석축만 남아 있을뿐 나머지는 복원된 것이다.
그러면 적성산성비(국보198호)의 형태와 가치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적성산성비의 발견은
1978년 1월6일, 3월23일, 4월5일, 세 차례에 걸쳐서
단국대학교 조사단(단장: 정 영호)에 의해서 온달성 유적조사 과정에서
30cm정도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견했으며
2. 비의 형태는
높이 93cm, 상폭은 107cm, 하폭은 53cm로 자연석을 이용한 화강암이며
글자수는 430 字 내외(22行 20字)며 현재는 288字와 비편 21字만 남아있고,
글씨체는 지름2cm내외의 해서체를 중심으로 한 예서체가 간혹 가미되기도
했고 상단부위 파손으로 글씨가 없어서 해석이 어려운 난점이기도 했다.
3. 그리고 가치성으로 볼 때
신라가 고구려의 한강으로 진출한 진흥왕 12년(551년) 전후로
산성이 건립되었으며 이성을 축성한 이후로는 신라의 경상도 권역에서
고구려의 충청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10개군을 점령)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산성정상에서 동.서.남.북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조 건을 갖추고 있어서 주민들의 움직임이라든지 적의 침공까지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는 요새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비문을 보면은
적성출신의 야이차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포상과 적성주민들의 충성심을 유도 하는 문귀며 배신하는 자는 가차 없는 형벌에 처 한다는 내용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통치제도를 엿 볼 수 있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쇠락하는 나라는 비운일 수밖에 없겠지만
야이차는 고구려의 매국노요, 신라의 첩자였으니 고구려의 정치, 문화....등이
모두 신라에 강점당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는 강자에 의해서 기록되나 보다......!!
소쇄원 (사적 제304호) (전남 담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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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외 연 락 처 : 소쇄원 관리사무소 (061-382-1071) 지정번호 : 사적 제 304호 소 유 자 : 사유(제주양씨 산보의 후손 양원로(양재영) 규 모 : 정원 일원(1,500평) 시 대 : 조선 중종(1530년대) 지정 연월일 : 1983년 7월 20일 개 요 :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 1519)가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 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 는 입구에 전 개 된 전원(前園)과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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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
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
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 (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소쇄원의 작은 연못. 소쇄원 계곡: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 (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다.
♣제월당(霽月堂):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
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소쇄원사십팔영시
(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있으며, 1755년(영조 31) 목판에 새긴「소쇄원도( 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소쇄원 담장과 광풍각 전경: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
(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
(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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